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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

우울

the Lower East Side, Cliff Dwellers  |  <남쪽의 저지대> 클리프 드웰러스


우울


낡은 계단 아래서 까맣고 깡마른 쥐 한 마리가 눈치를 살핀다.

더러운 옷을 입은 뚱뚱한 아이가 계단을 내려오자 쥐는 어두운 구석으로 재빨리 반짝이는 눈을 감춘다.


늘어진 속옷차림의 중년 남자가 빨갛게 달아오른 몸뚱이로 악취를 풍귀며

발을 뜰어 계단을 올라간다.

"야이, 돼지새끼야. 비껴."

계단을 내려오던 뚱뚱한 아이는 휘청거리다 겨우 몸을 가눈다.

"씨발, 술쳐먹고 왜 지랄이야."

"뭐라고, 이 좃만한 새끼가."

아이가 뒤뚱대며 길건너로 달아나지만 남자는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좃만한 돼지새끼가."


아이는 친구를 만나자 마자 두툼한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이 엉킨 뒤통수를 때린다.

미리 약속이 있었던 듯 그들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서 겨울 동안 동네 화로로 쓰던 드럼통 뒤로 숨는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길 건너 계단 아래의 까만 쥐는 다시 머리를 내밀어 이와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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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낡은 구두 한 켤레>


우울한 날입니다.

우울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좋아하지도 않으면 계속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오늘은 유독 '가난'이라는 테마가 머리에서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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