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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

[손바닥 소설] 내리사랑

 

다음 차례는 수수하지만 단아한 품의 고운 할머니였다.
“아이고, 고운 어머님이 오셨네.”
“네, 안녕하세요.”
할머니는 인사를 하고 소리없이 방석에 앉았다.
“그래, 뭐가 궁금해서 오셨어요?”
“손녀가 시험을 쳐요, 공무원이요. 1년 넘게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되어야 하거든요. 내가 아는 것도 돈도 없어서 도와주지도 못하고..., 그래도 착한 아이라 정말 열심히 했어요.”
“할머니가 키우셨죠? 엄마, 아빠가 안 보이네요.”
“네. 딸이 죽고 사위는 집을 나가버려서. 20년이 다 됐네요.”
“고생 많으셨네.”
“나는 괜찮은데...” 할머니가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우리 손녀가 너무 고생했어요. 그런데도 내색도 안하고.”
할머니에게 화장지를 내밀었다.
“그래서 합격이 어떻게 될지 알아보러 오셨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꼭 합격하게 해주세요. 떨어지면 애가 1년을 더 고생해야 하는데 마음이 아파서 못 보겠어요. 꼭 붙게 해주세요.”
할머니는 낡은 가방에서 두꺼운 돈 봉투를 꺼내서 앉은뱅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니, 일단 합격할 지부터 알아보고요. 잠깐만요.”

‘할아버지, 할머니 손녀가 합격할까요?’
할아버지는 평소와 다른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합격해. 무조건 합격해.’
‘아이고, 다행이네.’
‘할머니 정성이 닿은 거야.’
물어보기 시작한 김에 할머니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그럼, 할머니는 어때요?’
‘할머니?’
‘네, 할머니요. 앞으로 평안할지?’
‘할머니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쭉 잘 지내. 손녀만 합격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어.’
할아버지는 긍정적인 대답과는 달리 말끝에 한숨을 크게 쉬었다.

“어머니, 손녀는 이번에 백 프로 합격한다내요. 아무 걱정 안하셔도 되겠어요.”
“아이고, 고마워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냥 앞날만 봐준 거니까 복채만 뺄 테니 봉투는 도로 가져가세요.”
5만원 한 장을 빼고 봉투를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아니오, 아니예요. 받으세요. 이거 안 받으면 우리 애기가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못 받겠어요.”
돈을 받아라, 가져가라, 잠시 실랑이 있었지만 할머니가 완강해서 봉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할머니 제가 이 돈만큼 기도를 넣어드릴게요.”
“그래요, 그래. 우리 손녀 잘 되게 많이 빌어주세요.”

 

 

 

다음 차례는”그날 밤, 자려고 누우려는데 할아버지가 불렀다.
‘할아버지, 이 시간에 왜 그러세요.’
‘낮에 할머니가 준 봉투 어딨니? 가져와라.’
나는 봉투를 넣어둔 서랍을 열었는데 봉투가 보이지 않았다. 서랍장 서랍을 모두 열어도 봉투가 없었다.
‘아이고, 이게 어딜 갔지?’
‘없지? 있을 리가 없지.’
‘누가 가져갔어요? 보셨어요?’
할아버지는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직 모르겠니?’
‘네?’
‘그 할머니, 돌아가신 분이잖니.’
아차, 싶었다. 할머니 행동에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들어오고 나가면서도 문소리가 없었고 가방을 여닫는 소리, 방석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영들은 특유의 흐릿함이 있는데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뚜렷했다.
간절한 사랑, 할머니의 단단한 사랑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아버지.’
‘응.’
‘고마워요.’
‘새삼스럽게... 잘 자라,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