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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

[단편 소설] 순종하는 라이사

순종하는 라이사



그녀의 이름은 라이사이다. 스스로 알려준 이름의 뜻은 순종적인 여자’.

큰 키의 그녀가 회갈색의 맑고 큰 눈을 치켜 뜨면 웬만한 남자도 위압감을 느낄 터였지만, 그녀는 한 번도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어떤 느낌일 지 알 수 없지만 중키인 나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안도감과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건 마치, (외동아들이지만) 큰 누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가게 이름은 카페 라이사 Café Raisa’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층 오피스텔 1층의 술집이다. 나는 1년 전부터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다. 그 이전에는 아내와 딸 둘과 함께 살았는데, 여편네가 이혼을 요구했다. 그것도 엄마가 돌아가셔서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말이다. 재산을 거의 모조리 뺏겨버려 양육비도 주지 않고 있어 지금은 연락도 않고 지낸다.

 

나는 원래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다. 은행에서 회식을 할 때도 1차에서 건배 몇 번하며 홀짝거리는 술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혼 후에는 매일 한 잔씩 마시고 있다.

처음엔 혼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이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마트에서 2주일 분의 장을 보면서 인스턴트와 즉석 식품들 사이에 술 한 병을 끼워 넣는데도 5분 여를 망설여야 했다. 거칠 것 없는 아줌마들 틈에서 남자가 혼자 장을 보는 것은 민망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술병까지 챙겨 넣는 것은 누군가가 봐서는 안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겨우 장거리를 다 담고 계산대에서 술병을 꺼낼 때의 감정, 계산원 여자의 짧지만 강렬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혼자 작은 거실에 앉아 탁자에 술을 올려놓고 마실 때, 그 처음에, 텔레비전에서는 주말 코미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울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나님은 이런 시련을 주실까? 여편네에게 끌려 매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그렇게 기도를 하고 헌금도 냈는데 말이다. 마누라는 집에 있게 하고 혼자 교회에 나갔더라면, 감사 헌금을 아내 이름으로 하지 않고 내 이름으로 했더라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줬을 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마누라 편을 들어주었고 나는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

 

마트에서 술을 사는 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내 체질에는 양주가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 사람들처럼 얼음물에 스카치 위스키를 희석시켜 조금씩 마시는 게 좋았다. 게다가 양은 많고 도수는 높으며 뚜껑을 닫아두면 맛도 변하지 않아서, 위스키 1 병이면 한 달 동안 마실 수 있었다. 소주보다 효용이 높았다. 그리고, 혼자서 소주를 마시는 건 마치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소주에는 필수인 안주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별도의 조리가 필요 없는 마른 멸치와 고추장이 최고의 안주가 되어 주었다.

내가 마시는 술은 유럽 사람들이 품위 있게 마시는 술이고, 일본식으로 마시는 방법이 개발된 글로벌한 술이다.

라이사의 가게에 처음 방문한 건 3개월 전이었다. 토요일 밤 자정을 넘어서까지 포카를 치다가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 앞에 내렸는데 문득 집에 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편의점 외에는 술을 살 방법이 없었는데, 편의점에는 내가 마시는 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야간 판매의 프리미엄이 붙어 마트에서 판매되는 술에 비해 2배 정도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때 카페 라이사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유리창에는 이런저런 장식이 되어있었지만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설비와 가구,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나의 눈에는 금발의 백인 여자만 눈에 띄었다. 금발.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서 유일한 종업원인 금발 여자와 마주 보는 높은 의자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금발 미녀는 정확한 발음으로 인사를 했다. 어눌한 발음을 예상했던 터라 순간 당황했다.

, 안녕하세요.”

여자는 메뉴판을 내밀었다. 양주들이 정렬된 메뉴판에서 평소에 마시던 스카치 위스키를 찾아 한 병을 주문했다. 물론, 술값은 편의점에서보다도 3배는 비쌌지만, 여기는 마트와 편의점에는 없는 금발의 미녀가 있다.

얼음과 술병이 나왔고, 땅콩이 나왔다.

저기, 언니. 나는 멸치와 고추장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물도 좀 주세요.”

마침 멸치가 있어요. 잠깐만요.”

라이사는 피부보다도 하얀 치아를 보이며 멸치와 물을 준비했다.

물에 희석한 스카치 위스키 한 잔을 마셨다. 남은 술은 키핑을 해 두었고 나는 기분 좋게 일어섰다.

이후 나는 3개월째 저녁이면 카페 라이사를 찾는 단골이 되었다.

 

카페 라이사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덕분에 집에 술을 사둘 필요도 없었고, 먹을 땐 좋지만 의외로 오래 남는 멸치 냄새도 맡지 않아도 되었다. 당연히 마트에서 사서 집에서 마실 때에 비해 가격은 비쌌다. 술값만 따지면 5.5 배 정도였지만, 물값과 멸치값은 들지 않았다. 혼자 사는 40대 남자 은행원-정확히는 과장-은 이 정도는 쓸 여유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얘기를 재미있어 하는 사람은 근 몇 년 간 라이사가 처음이었다.

라이사 언니는 안 쉬어?”

. 저야 한국에 친척도 없고, 러시아랑 명절도 달라서, 그냥, 매일 열어요. 딱히 할 일도 없구요.”

친구들도 만날 거 아냐? 고향 친구라든지.”

같이 무용단에 있던 친구들이 있는데 낮에 만나면 되니까요.”

무용단?”

놀이동산 퍼레이드 하는 무용수들 있잖아요. 그들 중 한 명이었어요.”

, , 비키니 같은 옷 …”

어서 오세요.”

마침 새 손님이 들어왔고 대화는 끊어졌다.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지금 들어오고 지랄이야.’

라이사가 주문을 받고 준비를 하는 동안 조용히 술을 마셔야만 했다. 애 아빠일 때 놀이동산은 지옥과 같은 곳이었지만 무용수들의 퍼레이드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비키니를 입고 가슴과 엉덩이를 흔드는 백인 여자들. 아마 채용 조건에 글래머라는 단서가 붙을 것이다. 사이즈를 기준으로 한다면 라이사는 퍼레이드의 주연급이 분명했다.

그날,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술자리였다. 손님이 많아 라이사는 분주했다. 키핑한 술에, 안주도 시키지 않았으니 조용히 일어서서 카페를 나섰다.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오늘, 어머님 기일이야.”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엄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나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엄마는 지금 하나님 옆에 있을 것이다.

오늘은 두 잔은 마셔야겠어.”

,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라이사는 예의 환한 미소로 안부를 물었다.

마누라한테 문자가 왔거든. 아니, 엑스와이프한테서 말야. 지가 왜 우리 엄마 제삿날을 챙기는지 모르겠어.”

제사는 안지내세요?”

기독교거든, 우리 집이.”

그런데, 술은 …”

예수님도 와인은 드셨는데 뭘. 나는 와인보다 더 연하게 마시고 말이지.”

두 잔 째가 되자 취기가 올라왔다.

우리 엄마. 아들 하나 잘 되라고 맨날 기도하고, 대학 보내느라 학원이랑 과외도 엄청 시켜 주셨어. 덕분에 스카이 SKY’이 아니래도 인 서울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고 말이야.

대학생일 때도 취직해야 되니까 돈 많이 들잖아. 남편도 없이 그 돈을 다 댔다니까? 할아버지가 강남에 아파트를 남겨주지 않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지.

결혼도 교회에서 제일 참하다는 여자로 골라주고, 아파트도 사주셨는데

우리 엄마의 가장 큰 실수는 내 마누라를 선택한 거였어. 인간미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여편네.. 더군다나 엄마가 사준 아파트도 뺏어 가버렸으니, 우리 엄마, 크게 실수한 거야.

덕분에 이렇게 라이사 언니도 만나게 됐지만 말야. 히히

그날은 라이사와 한참을 대화했다. 비가 와서인지 대화를 방해하는 손님이 없었다. 아름다운 라이사는 밝은 표정으로 함께 해주었다.

나는 라이사를 사랑했다. 라이사도 분명 나를 사랑했다. 최소한 상당한 호감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다지도 상냥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고백하기에는 망설여졌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은행원에 시부모도 없는 남자면 괜찮은 조건이 아닌가? 배가 좀 나오긴 했어도 큰 병에 걸린 적도 없었다. 라이사보다 조금 작은 키도 문제가 안될 터였다. 내가 작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유난히 큰 것이었으니까. 단지, 고백은 쉽지 않았다. 고백을 했다가 덜컥 결혼이라도 하자고 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라이사처럼 빵빵한 여자와 결혼을 하면 즐겁기야 하겠지만 남들은 장가를 못 가서 외국에서 여자를 온 것으로 쳐다볼 것이 뻔했다. 그냥 애인만 되면 참 좋을 텐데.

러시안 글래머가 애인이라면 모두의 부러움에 대상이 되지만, 만약 그런 여자가 아내라면 나는 천하에 다시 없을 속물이 되는 것이다. 내 사랑이 변색되는 건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고백을 했다.

 

 

라이사 언니!”

,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술 한 잔 했어. 같이 일하는 놈이 이혼을 했거든. 어떻게 하면 좋냐며 막 울더라고, 모자란 놈.”

이혼은 어쩌다가?”

바람 피우다 걸린 거지. 지가 잘못해 놓곤 울긴 왜 울어. 이유도 없이 이혼 당한 나 같은 놈이 억울한 거지.”

손님은 어쩌다가?”

난 바람 같은 건 피우지 않았어. 일과 집이 전부였던 사람이야. 마누라와 두 딸을 위해서만 살았다고.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야. 그 땐 슬럼프였어. 엄마와 나, 딸랑 두 식구였는데 완전히 혼자가 된 거였거든. 너무 불안했어.”

부인과 애들이 있으시잖아요.”

그 세 여자는 작당을 했는지, 어느 날부터 나를 따돌리고 지들끼리 놀더라고.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자기들끼리 사 먹고 사 입고…, 내가 남편이고, 내가 아빠고, 내가 가장인데 말야.”

테이블에 앉아있던 연인과 그 옆 테이블의 남자 둘이 나를 쳐다봤다. 취기와 분노가 섞여 목소리가 커져 있었다.

미안해, 언니. 좀 흥분했나봐. 그런데, 정말이지 이해가 안돼. 나는 흔히 말하는 회사와 집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야. 아침에 은행으로 가서 8시에 퇴근해서는 곧장 집으로 가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지. 술도 안 마셨어. 취미라곤 주말에 즐기는 낚시와 골프가 전부야.

15년을 가족을 위해 헌신했어. 바람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심지어는 TV에 나오는 여배우와 걸그룹의 이름조차 몰라. 진짜 깨끗한 남자라고.

라이사 언니, 어떻게 생각해? 나 같은 남자면 괜찮지 않아?”

훌륭한 분이시죠. 성실한 사람이 최고예요. 아직 나이도 젊으시니 좋은 분이 나타날 거예요.”

나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언니, 혈액형이 뭐지?”

? O형이예요.”

A형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여자 O형과 남자 A형은 궁합이 90%. 우리 사귀자.”

가게 안, 다른 네 명의 손님들이 프로포즈의 결말을 기대하며 흥미진진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라이사의 눈동자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흔들렸다.

빨리 대답해!’

꺼져! 병신아!”

라이사가 소리쳤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 이게 뭐지. 외국인이 욕도 하네.’

너 같은 놈한테 어떤 미친 년이 붙어 먹냐? 어디서 병신새끼가 집적대고 지랄이야.”

언니, 나는, 손님, 손님인데.”

손님 같은 소리하네. 술 한 병 시켜놓고 한달 동안 쳐먹는 새끼가 거지지 손님이냐?

안주도 안 시키면서 맨날 멸치만 내놓으라고 하고, 너 때문에 가게에 멸치 냄새가 나서 미치겠거든. 멸치 대가리만 보면 니 생각이 나서 구역질이 나서 죽을 것 같다고.”

손님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쪽 팔리고싶지 않았다. 나는 높은 의자에서 천천히 내려섰다.

언니, , 갈께.”

언니는 무슨 언니야? 니가 여자야? 니가 나보다 어려? 삼촌 같아서 하는 말인데, 어딜 가서도 폐만 끼치니까 딴 데 가서 술 쳐먹지 말고 집에서 혼자 쳐먹어, 멸치 대가리 따면서!”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지만, 몸에서 모든 기운이 빠져버려 빨리 나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울면 더 쪽 팔린다.’

남은 힘을 짜내 천천히 돌아섰다.

남은 술 가져가!”

나는 다시 라이사 쪽으로 돌아서서 술병을 잡았다.

한 번만 더 와봐라. 멸치처럼 대가리를 따버릴 테니까.”

술병을 들고 다시 돌아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유리문이 닫히자 안에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들렸다.

술병을 든 손을 자켓으로 가렸다. 알코올중독자처럼 보이기 싫었다. 더 이상 창피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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